한국의 맹자 언론가 이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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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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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정치를 꿈꾼 언론가 이율곡

정론과 직언으로 이름난 조선의 유학자 이율곡(李栗谷, 1536~1584).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지만, 정작 그의 글이나 삶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과거에서 아홉 번이나 장원을 한 천재, 임진왜란을 내다보고 10만 양병설을 주창한 사람, 퇴계 이황과 함께 우리나라 성리학의 두 기둥을 이루는 명현(名賢), 대개 딱 그 정도이다.

한국일보 편집국장과 주필을 지낸 언론인 임철순이 이율곡의 삶을 그의 언론 활동을 중심으로 조명했다. 책제에서 드러나듯, 저자는 이율곡을 <맹자>와 <주필(主筆)> 두 가지 키워드로 정의한다. 왕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왕도 정치를 구현하려 했던 정치가·사상가라는 점에서 <한국의 맹자>, 시대의 공론 형성과 유지·발전을 선도한 점에서 조선이라는 신문사의 <주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율곡은 관직 생활 대부분을 언론 기관인 삼사(三司)에서 보냈고(특히 39세와 43세, 44세 때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데 이어, 46세 때는 사헌부 대사헌과 홍문관 대제학을 역임하는 등 세 기관의 수장 직을 두루 거쳤다), 왕의 면전에서도 직언과 고언을 쏟아낸 쾌직(快直)한 인물이었다.

이 책은 짧았지만 치열했던 율곡의 삶을 그가 남긴 상소와 대면 직언, 저술,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등을 통해 살핀다. 그의 어록과 사후 문인들의 다양한 평가, 주요 저술에 대한 소개 등도 싣고 있어, 독자들은 율곡이라는 인물의 특징과 학문적 업적 등도 두루 살필 수 있다. 특히, 임금을 바른길로 이끌어 <무너져 가는 집> 조선을 다시 세우려 했던 율곡의 치열한 삶은 정론과 직언이 희미해지는 우리 정치와 사회 현실에도 적지 않은 울림을 줄 것이다.

<조선이라는 신문사>의 주필

조선 시대 언관과 사대부들은 백성의 말과 글이 조정에 전달되는 여론 통로를 <언로(言路)>라고 했고, 이 언로가 열리느냐 막히느냐에 나라의 흥망이 좌우된다고 믿었다. 저자는 율곡이 <언론인에게 필요한 자질을 두루 갖추고 시종여일 언론의 역할에 충실했던 사람>이라고 정의하며, 언론가(言論家) 이율곡의 특징을 이렇게 요약한다. ① 시의에 맞는 상소(「만언봉사」 등)와 특별한 저술(『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을 통해 정론직필을 펼친 논설위원이자 오피니언 칼럼니스트, 2 객관적인 기술과 사실 묘사(『경연일기』)로 역사 기록을 남긴 현장 기자, ③ 냉엄한 인물 평가(『경연일기』)를 통해 국정과 용인의 잘잘못을 가린 분석・해설가, ④ 일상의 언행과 국왕 면대를 통해 할 말을 다한 실천 지성, ⑤ 철저한 현실 감각을 바탕으로 국가와 사회 개혁 방략을 제시한 대기자(大記者).

지금은 나라에 기강이 없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만일 이런 상태로 간다면 다시는 희망이 없습니다. 반드시 주상께서 큰 뜻을 분발하시어 일시에 일깨워 기강을 세운 뒤에라야 나라가 될 것입니다. 기강은 법령과 형벌로 억지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정이 착한 것을 착하다 하고 악한 것을 악하다 하여 공정함을 얻어 사사로운 마음이 유행하지 않아야만 기강이 서는 것입니다. 지금은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고 정(正)이 사(邪)를 이기지 못하니 기강이 어떻게 서겠습니까? - 선조 6년(1573) 경연 중에서, 본서 100면

비유컨대, 임진왜란을 겪고 『징비록』(국보 제132호)을 남긴 서애 유성룡이 사실(史實)에 충실한 투철한 종군기자였다면, 경연 활동과 상소, 계, 저술 등을 통해 국가의 나아갈 방향과 개혁 방략을 제시한 율곡 이이는 <조선이라는 신문사>의 주필이었던 셈이다.

정론 직필의 율곡이 살아 있다면

<친소(親疏)와 관계없이 사람들에 대해 가혹할 정도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율곡은 왕이나 동료 사림들로부터 두렵고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의 글이나 말에는 해학이나 유머가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정론 직필, 직언>이다. 그가 선조를 향해 쏟아내는 글은 읽는 이들조차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신랄하다.

전하께서는 오늘날 국가의 형세에 대해 의관만 정제하고 가만히 앉아 있더라도 끝내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아니면 바로잡아 구제하고 싶어도 그 대책을 모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뜻이야 갖고 있지만 어진 신하를 얻지 못해 일을 추진하기 어렵다고 여기십니까? 그도 아니면 흥하든 망하든 천운에만 맡기고 인력을 들이지 않으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 1582년(선조 15년) 9월 세 번째 「만언봉사」 중에서, 본서 84면

<시대와 겨루고, 왕과 속유(俗儒)들과 다투고, 자신의 건강과 싸우느라> 율곡의 삶에는 <윤기>와 <여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율곡은 12년이 조금 안 되는 벼슬살이 기간에 크고 작은 업적을 남겼다. 동서 붕당을 보합(保合)하려고 애썼고, 특히 경제사(經濟司) 설치, 과세 제도와 인사 제도 개혁, 서얼(庶孼) 허통책 실시, 10만 양병설 등 현실에 바탕을 둔 구체적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선조는 율곡을 존중은 하되 건의된 시책을 따르지는 않았다. 동과 서로 편이 갈린 사림은 율곡의 말을 받아들이기보다 시비하고 탄핵하기 바빴다. 그렇게 세 번째 만언봉사를 임금에게 올리고 2년 뒤 율곡은 영면했다. 임진왜란 8년 전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평시에 위기와 파국을 생각하는 거안사위(居安思危)의 우환 의식과, 현장을 떠나지 않고 밀착해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모색하는 언론 감각이 율곡의 생애를 형성하고 관통한 요소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만약 율곡이 <더 살았더라면, 영의정에까지 올라 좀 더 나라에 기여할 수 있었다면 나라 꼴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안타까움을 내비친다. 그리고 그런 안타까움은 오늘날 우리 정치와 사회 현실, 언론까지 닿아 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기개, <나라의 공론을 주도하고 글과 말로써 시대의 나아갈 방향을 밝혔던> 정론 직필이 희미해지는 지금, 저자가 굳이 이율곡의 목소리를 꺼내 글로 전하는 이유이다.

한국의 맹자 언론가 이율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