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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과 배신의 인문학
"인간을 구속하는 종교나 사상은 백해무익하다"
우리는 인문학의 빈곤 시대에 살고 있다. 인문학은 타락했고, 탐욕과 배신과 욕망에 물들었다. 반인간적인 물질주의가 판을 치고 있음에도 물질과 반대인 정신이나 인간을 중시한다는 인문 혹은 인문학이 유행하고 있으니 더욱더 기이하다. 가짜 인문학이 성업 중인 세상에서 민주주의는 도저히 성립할 수 없다. 특히 동서양의 지배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 없이 무조건 찬양하는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 자유와 평등과 평화를 지향하는 민주적 연대 의식과 사회적 연대 의식이 이렇게까지 빈곤한 시대가 또 있었던가? 그렇다면 타락한 인문학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인문학을 읽을 것인가?
『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는 인문의 출발과 고대의 인문에 대한 이야기인 『인문학의 거짓말』에 이어지는 중세의 인문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인문학의 거짓말』에서 고대 인문에 대해 쓰면서 부처나 예수도 아나키스트라고 명명했다. 반면 서양의 주류 사상인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그들과 대립한 사상가로 디오게네스를 내세웠다. 디오게네스는 예수로 이어졌으나, 예수의 아나키즘은 바울과 콘스탄티누스 등에 의해 배신당해 서양 중세 1,000년의 세월 동안 왜곡되었다. 서양이 자신들의 종교였던 기독교를 아나키스트 예수의 믿음으로 되돌려야 그 제국주의를 끝낼 수 있다.
『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는 인도, 이슬람, 중국, 한반도의 중세 인문을 서양 중세 인문과 같은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즉, 서양 중세는 이 중세 이야기 중 4분의 1 정도다. 특히 암흑시대라고 알려진 서양 중세와 달리 비(非)서양 중세는 개명시대였음을 새롭게 주장한다. 우리가 흔히 중세라고 하는 6~16세기에 서양은 그 앞뒤의 시대에 비해 낙후된 반면, 비서양은 그 어떤 시대보다 앞선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저자는 그동안 거의 다루지 않은 『코란』과 이슬람 사상과 예술,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동에서는 이슬람 문명이 탄생했고, 중국에서는 수·당·송의 불교문화 등이 다양하게 꽃을 피웠으며,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도 그 못지않은 찬란한 문명이 개화되었다. 그야말로 개방과 관용의 문화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찬란한 문화가 나타났다. 조선시대보다 그 이전 중세에 훨씬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관용적이고 다양한 문화가 창조되었다. 비서양 근대는 서양 근대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해 암흑시대로 전락했다. 그런 서양 근대의 암흑에 비하면 서양 중세조차 개명으로 볼 여지가 있다. 세계사 속의 중세란 오직 서양의 중세였다. 비서양의 중세가 있어도 그것은 서양이 바라본 중세였다. 이러한 역사관은 서양 근대 중심 세계관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흔히 말하는 '지리상의 발견'이 아니라 '지리상의 침략'으로 시작되는 서양 중심의 근대는 마침내 2019년의 '코로나19'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것은 1980년대 이후의 소위 글로벌리제이션이 초래한 미증유의 팬데믹이라고 볼 수 있지만, 조금 더 길게 보면 16세기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침략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 그것을 약자인 피해자의 마조히즘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웃으며 아예 역사에서 제거하려는 가해자적 심성의 서양주의 인문학과 그 추종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21세기 초에 닥친 재난의 일상화는 그런 비웃음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더욱이 코로나19에 대한 미국이나 유럽의 대응은 서양이 세계의 으뜸이거나 희망이 아니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