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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잘못 디디면 굴러서 냇물에 빠져버리는 비탈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학교에서 돌아온 친구들은 골목길에 모여서 공기놀이나 목자놀이를 했다. 사오십 분 거리의 논밭으로 우는 동생을 업고 젖 먹이러 갈 때는 뱀을 만나기도 했다.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이 제 발로 걸어 다니기 시작한 후로는 소를 몰아야 했다. 풀 뜯는 소가 흔드는 꼬리를 따라다닐 때마다 언니가 즐겨듣던 유행가 가사를 읊조리면 개울이 따라서 물소리를 흘렸다.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 주평리 후가막 마을을 이룬 그 곳의 바람, 햇빛, 흙...... 막 피어오르는 젖 몽우리를 훔쳐본 내 친구들이다. 하교 길, 풀숲에 던져두었던, 다람쥐 이빨 자국이 남아있는 고구마를 찾아 한 입 가득 깨물어먹으며 집으로 오던 날, 아버지를 만나는 날은 또래 아이들의 영웅이었다. 이랴! 저랴! 워! 아버지의 달구지 모는 소리가 내 귀 안에 별처럼 박혀있다.고향집 뒤뜰 배나무 가지가 까맣게 삭아 내리고 동구 밖 느티나무 둥치가 제 모습을 잃어갈수록 달구지와 화전에 젊음을 바친 아버지의 헛기침소리가 좋아졌다. 빈집만 늘어가는 고향 마을 고추밭에서 고추 대를 세우고 계실 아버지의 묵묵한 삶이, 아버지를 닮아 가는 내 삶의 부분들이 나를 자꾸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낙엽 위를 걷는 빗소리가, 방금 흙을 들어 올린 한 포기 풀이, 잠자는 나를 벌떡 벌떡 일으켜 세운다.천둥소리로 계곡물소리로 내 가슴을 두드려놓고는 냉큼 달아나 버리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의 발목을 붙잡아서 하나의 생명체로 탄생시키고 싶다. 이 지구상에 오래오래 머물 수 있도록 든든한 집 한 채 지어주고 싶다. 나그네가 하룻밤 묵어가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집, 그런 집을 내 손으로 지어주고 싶다. 그 집이 빛을 발할 수 있을 때····· 아버지께서 옆에 계셨으면 좋겠다. - 유순예, 시인의 말(책머리글) <단상(短想)>·